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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택배상자와 마음상자

by 엄라이터 2025. 5. 21.

택배상자와 마음상자
 
서울의 북적한 대단지 아파트, ‘은빛마을 4단지’.
이곳은 경비실마다 무전이 오가는 바쁜 공간이었다.
아침이면 출근 차량, 저녁이면 배달 오토바이, 그리고 늘 택배차가 들락날락했다.
“택배는 경비실에 맡겨 주세요.”
“택배는 101동 지하 입구로요.”
“아니요, 직접 집 앞에 놔달라고요!”
하루에도 수십 번, 같은 말을 반복하며 일하던 경비원 김영복씨는 요즘 부쩍 어깨가 축 처졌다.
택배차량의 단지 내 진입이 제한되면서, 경비실과 입주민 사이에 끊임없는 실랑이가 오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일이 터졌다.

 
“아니,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요! 집 앞에 놔달라고 했잖아요. 그걸 왜 경비실에 맡겨요?”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중년 남자가 경비실 앞에서 언성을 높였다.
“죄송합니다. 요즘 단지 내 배송 금지라서… 기사님도 어쩔 수 없다고 하셔서…”
김영복씨는 고개를 숙였지만, 남자는 성이 풀리지 않은 듯 소리쳤다.
“내가 여기 관리비를 얼마나 내는데, 택배 하나 집 앞에 못 오게 한다고? 당신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그 순간, 주변을 지나던 주민들의 시선이 모였다.
엄마 손을 잡고 걷던 아이는 작게 속삭였다.
“엄마, 왜 아저씨가 할아버지한테 화내요? 잘못도 없는데…”
다른 주민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요즘 세상에… 저건 갑질이지.”
그때, 502동의 박선아씨가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저기요, 혹시 조금 시간 괜찮으세요? 아파트 대표자 회의에서 택배 문제로 논의 중이었는데요,
좋은 의견 주시면 함께 개선할 수 있어요.”
남자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제가 뭐… 꼭 그런 뜻은 아니었고요….”
“그렇죠. 저희도 다 불편한 거 알아요. 그런데 다들 나름대로 협조하고 있거든요.
대신 저희가 택배 보관함도 늘리고, 엘리베이터 이용 안내도 마련하려고 해요.
같이 해결책 찾아보면 어떨까요?”
다른 주민들도 슬그머니 모여들어, 한 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우리 단지 크니까 기사님들 힘든 것도 이해해요.”
“경비 아저씨들 진짜 고생 많으세요. 우린 항상 감사하게 생각해요.”
“다같이 불편함을 줄이려는 중이잖아요.”
갑질하던 남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예민했네요. 죄송합니다, 아저씨.”
김영복씨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아닙니다. 피곤하셨을 텐데 제가 더 신경 쓸게요.”
그날 이후, 주민 게시판에는 이런 글이 올라왔다.

“경비원님들, 언제나 감사합니다.”
“택배 보관함 위치 좋아요! 개선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는 아파트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 아래, 문제의 남자도 익명으로 글을 남겼다.

“반성하고 갑니다. 저부터 마음을 고치겠습니다.”

 
택배상자는 집 앞에 놓이지 않았지만, 마음상자는 모두의 가슴에 조용히 도착한 날이었다.
진짜 배달되어야 하는 건 상자보다 따뜻한 말 한마디.
그 작은 말 한마디가 큰 아파트를 더 따뜻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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