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이 아니었다》
스물여덟, 승민은 세상과 등을 진 지 오래였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이것저것 해봤지만, 다 실패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직장도, 꿈도. 지금은 좁은 고시원 방에 살며 무의미한 하루를 때우는 것이 일상이었다.
라면 한 봉지 남기며 “내일은 좀 나아지겠지” 생각해도, 내일은 늘 오늘보다 나빴다.
그리고 이번 달. 월세가 두 달이나 밀렸다.
고시원 관리인이 문을 쿵쿵 두드리며 말한다.
“이번 주 안에 안 내면 짐 빼줘야 돼.”
승민은 다급해졌다.
누굴 도울 생각도, 구걸할 자존심도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도둑질’이었다.
그는 몇 날 며칠을 들여 서울 외곽의 고급 단독주택 하나를 유심히 살폈다.
낮에도 밤에도 인기척이 없고, 우편함엔 전단지가 쌓여 있었다.
‘빈집’이라 확신했다.
드라마에서처럼 감시 카메라는 피해 다녔고, 창문 하나쯤은 열려 있었다.
결국, 그날 밤. 그는 후드티를 눌러쓰고 장갑을 끼고, 그 집 담장을 넘었다.
⸻
거실은 예상보다 따뜻했다.
냉기가 돌 거라 생각했지만, 보일러가 돌아가고 있었다.
‘자동 예약인가?’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탁자 위에 컵 하나. 마신 흔적이 있다.
순간 승민의 심장이 벌렁였다.
그때였다.
조용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부엌 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였다.
“거기, 누구니?”
순간, 승민은 얼어붙었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할머니의 눈빛이 발목을 붙잡았다.
놀라지 않았다. 분노하지도 않았다.
그저… 외로워 보였다.
“죄, 죄송합니다. 전… 그냥—”
“배고프니?”
할머니는 의자 하나를 당기며 말했다. “밥 먹었니? 배고프겠다. 밥 차려줄게 먹고가렴.”
그날 밤, 승민은 할머니가 차려준 김치찌개와 밥을 먹었다.
말없이 밥을 먹는 승민을 할머니는 조용히 바라보았다.
“우리 아들도 너처럼 생겼었어. 10년 전에 연락 끊기고, 그 후로 한 번도 못 봤어.”
승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람이 살다 보면, 길을 잃을 수 있어. 근데 말이야, 길을 잃었다고 끝은 아니야. 다시 찾으면 돼. 늦지 않았단다.”
말없이 고개를 숙이던 승민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며칠 후, 고시원 관리인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밀린 월세가 전액 입금되었고, 방엔 편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길을 잃은 채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어느 따뜻한 ‘빈집’에서, 사람 사는 온기를 다시 배웠습니다.
늦지 않게 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승민은 그날 이후, 다시 시작했다.
새벽 인력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했고, 짬짬이 검정고시 공부도 했다.
매주 주말이면 손에 과일 한 봉지 들고 ‘빈집’에 들렀다.
이젠 더는 빈집이 아니다.
그곳엔 따뜻한 밥과 기다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한 사람의 인생이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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