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 윤이
서울 성수동의 어느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IBC 뉴스룸에서 마지막 뉴스를 마친 박진우는 오늘도 늦은 퇴근길에 올랐다.
손에 들린 컵은 늘 마시던 아메리카노지만, 혀끝에 남는 맛은 왠지 모르게 씁쓸했다.
그는 늘 그랬듯 혼자였다.
화려한 말솜씨와 날카로운 눈빛으로 브라운관을 장악하는 그였지만, 카메라가 꺼지는 순간부터 그는 그저 “윤이”라는 이름 하나에 사로잡힌 남자였다.
“윤이...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진우는 이름 두 자만으로 사람을 찾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잘 알았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그의 아홉 살, 고요한 폭풍 같던 유년의 기억 속, 자신을 지켜줬던 아이.
진우의 이름 하나만 기억해준 유일한 아이.
그러나 정작 그는 윤이의 얼굴도, 성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날도, 그는 또 하나의 사무소 문을 열었다.
“박윤이 세무사사무소”
아니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나왔다.
몇 년 째 계속되는 반복.
심지어 이젠 윤이도 이미 결혼을 했거나 외국에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는 이름 하나만 있으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마음속으로 ‘아니다’를 되뇌었다.
그러던 어느 봄날.
유난히 햇살이 따사로운 날이었다.
진우는 어릴 적 살던 부암동에 어쩐 일인지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가지 않았을 골목.
그 골목 어귀에서부터 진우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기억이 날까...”
자신이 살던 낡은 빌라 자리를 지나고, 부암초 후문 앞을 걷던 그는 문득 한 간판에 발이 멈췄다.
“채윤이 세무사사무소”
윤이라는 이름에 이끌려 힘껏 문을 밀었다.
따뜻한 조명이 켜진 조용한 사무실 안.
투명 아크릴 뒤로 보이는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진우의 심장이 멈춘 듯 했다.
그녀였다.
그때 그 눈빛, 그 얼굴.
얼굴에서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지만, 진우는 단번에 알아봤다.
“윤이...”
하지만 그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어서 오세요. 어떤 일로 오셨나요?”
진우는 미소 지었다.
“세금 관련해서 문의 좀 하려고요. 그리고... 부동산 상담도 좀...”
윤이는 환하게 웃었다.
“두 가지 다 가능합니다. 잠시만 앉아 계세요.”
진우는 의자에 앉으며 속삭였다.
“윤이야, 나야. 박진우.”
그러나 그는 그 말을 삼켰다.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기억나게 해주고 싶었다.
그가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찾아 헤맸는지...
지금은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기억해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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