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의 두 번째 봄
〈지수의 두 번째 봄〉
“그래도 엄마 말씀인데 좀 참고 들어주지, 왜 그렇게 말끝마다 받아쳐?”
도현의 말에 지수는 찬물을 끼얹은 듯 얼어붙었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
예비시어머니는 예단부터 예복, 신혼집 인테리어까지 시시콜콜 간섭했고,
예비시누이는 “요즘 신부들 왜 이렇게 까다로운지 몰라”라며 대놓고 면박을 줬다.
지수는 꾹 참았고, 도현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지만 돌아온 말은 늘 같았다.
“우리 집은 원래 그래. 그냥 적당히 넘어가. 네가 좀 이해해 주면 안 돼?”
그 말이 지수를 가장 서운하게 만들었다.
그의 입에서는 단 한 번도 "내가 알아서 이야기해 볼게"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결혼식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던 어느 날, 도현의 어머니는 지수의 친정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단 보내신 거, 저희 집에서는 좀 당황스러웠어요. 요즘 누가 이렇게 해요? 형편이 어려운 것도 아닐 텐데요.”
지수의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웃었지만, 지수는 속이 끓었다.
그날 밤, 지수는 조용히 도현을 불러 말했다.
“우리 결혼 그만하자.”
“갑자기 왜 이래? 별거 아닌 일에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
“별거 아니라고 말하는 너랑, 아무것도 아닌 척 넘어가는 너희 가족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나, 이 결혼 원하지 않아.”
도현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지만, 지수는 더는 미련이 없었다.
그 길로 파혼을 통보했다. 식장 위약금도, 예단, 예물 문제도 기꺼이 감수할 생각이었다.
며칠 후, 지수는 짐을 싸서 제주도로 향했다.
아무 계획 없이 그냥 떠나고 싶었다.
그렇게 찾아든 바닷가 마을에서 ‘느린 책방’이라는 이름의 작은 북카페를 발견했다.
처음 들어갔을 때, 커피 향보다 더 따뜻한 것은 사장 민우의 눈빛이었다.
“책 좋아하세요?”
“네, 아주 많이요.”
지수는 그날 이후 매일같이 북카페에 들렀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책을 읽었고, 틈틈이 민우와 책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이 책, 주인공이 꼭 지수 씨 같아요. 상처받았지만, 쉽게 무너지지 않는 사람.”
민우의 말에 지수는 작게 웃었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결국 다시 일어서는 법을 알아요.”
지수는 어느새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마음이 고요해지고, 따뜻해졌다.
민우는 서두르지 않았고, 말로 감정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책을 건네고, 눈빛으로 안아주는 사람이었다.
휴가가 끝난 후 지수는 서울로 돌아왔다.
파혼 정리, 위약금 처리, 예물 반납. 한동안 바빴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평온했다.
그리고 어느 날, 오래전부터 꿈꿨던 서점을 열었다.
이름은 〈두 번째 봄〉
“다시 나를 사랑하기로 결심한 날부터, 나의 봄은 시작됐다.”는 문구를 간판 아래에 적어두었다.
오픈 첫날, 문을 열고 들어온 낯익은 얼굴.
민우였다. 그가 환하게 웃으며 책 한 권을 건넸다.
“이 책, 추천하시나요?”
지수는 웃었다.
“제가 이 책으로 다시 살아보고 있거든요.”
“그럼 저도, 여기서 다시 살아봐도 될까요?”
지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북카페에서 마시던 커피 향이, 이제 그녀의 서점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