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짧은 에세이 - 버스 안의 노약자석

엄라이터 2025. 6. 2. 10:34

버스 안의 노약자석

 

 

서울의 한 시내버스 안. 평일 오후라 승객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노약자석은 예외였다.
다섯 개의 노약자석은 이미 가득 차 있었고, 그중 한 자리에 젊은 여성이 앉아 있었다.

단정한 티셔츠와 검정 슬랙스 차림, 겉보기엔 임산부라는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는 작은 핑크빛 배지가 달린 가방이 걸려 있었다.

몇 정거장이 지나, 버스가 정류장에 멈추고 7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탑승했다.

허리가 살짝 굽은 할아버지는 버스 안을 천천히 둘러보다 노약자석을 향해 시선을 멈췄다.

그러더니 젊은 여성을 보고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가씨, 여긴 노약자석인데 젊은 사람이 앉아 있는 건 아니지 않소?"

여성은 당황한 듯 손에 들고 있던 임산부 배지를 보여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죄송해요, 저 임신 초기라 몸이 많이 힘들어서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눈을 피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에이, 요즘 젊은 사람들은 핑계만 많아. 보기엔 멀쩡한데..."

순간 버스 안이 싸늘해졌다.

눈치를 보던 승객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조용히 창밖만 바라봤다.

여성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뒷문 쪽에서 한 아주머니가 천천히 걸어오더니, 두 사람 사이에 섰다.

머리카락을 단정히 말아 올리고, 보랏빛 조끼를 입은 아주머니는 차분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르신. 아무리 젊어도 임산부는 힘들어요. 배 속에 또 한 생명을 품고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게 얼마나 무겁고 아픈 일인지 겪어보지 않으셔서 그래요."

순간, 버스 안이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아주머니는 이어서 말했다.

"노약자석이란 노인만을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몸이 약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 모두가 쉴 수 있는 자리예요.

진짜 어른이라면, 힘든 이에게 자리를 양보할 줄 아는 마음도 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 말에 할아버지는 멈칫했다.

마치 따뜻한 손길이 등을 스치는 듯한 순간이었다.

그는 잠시 입을 꾹 다물더니,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내가 경솔했구먼. 미안하오, 아가씨."

여성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저도 설명이 부족했어요."

이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승객들은 미소를 지었다.

버스 안의 공기는 따뜻해졌고, 버스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날 버스 안의 노약자석은 단지 자리를 둘러싼 공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이 자라나는 작은 교실이었다.
나이 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른이 되는 법을 깨닫는 것임을, 그날 모두가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