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고개 숙인 옹성일

엄라이터 2025. 5. 24. 00:56

『고개 숙인 옹성일』

경기도의 한 소도시, 다소 흐릿한 초봄 햇살 속에서 옹성일 시장은 빼곡한 유세 일정을 소화하느라 연신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고 있었다.
흰 장갑을 끼고 시민들을 향해 고개를 숙일 때마다 그는 다정한 미소를 짓고, "열심히 하겠습니다!"를 외쳤다.
마치 시민들의 발이라도 되겠다는 듯 고개를 조아리는 그의 모습은 마치 4년 전을 데자뷔처럼 떠올리게 했다.
그런데도 시장의 말투에는 어딘가 어색한 진심 없는 울림이 있었다.
4년 전 당선 이후, 공약이행률은 바닥이었고, 시민들과의 면담 요청은 ‘일정 조율 중’이라는 말만 반복된 채 끝내 무산되었다.
그가 도시에 남아 다시 출마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중앙 진출이 가로막히자, 이곳에서라도 권력을 붙잡기 위해서였다.
그날 오후, 재래시장에서 옹성일이 악수를 건네던 찰나였다.
한 중년 남성이 떡집 앞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시장님! 4년 동안 어디 계셨어요? 재래시장 활성화 한다고 하더니, 철거 말곤 한 게 없잖아요! 이젠 또 표 달라고요?"
사람들의 걸음이 멈췄다. 순간, 정적이 흘렀고, 옹성일의 미소는 굳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어르신 복지센터 짓는다더니 부지 매입도 안 했잖아!"
"맘카페에서 글 썼다가 시장실에서 전화 왔었어요. 비판하면 안 되는 거예요?"
여기저기서 분노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심하게 걸어가던 시민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그들이 손에 든 것은 옹성일의 공약 팸플릿.
낡고 접힌 종이 위에 적힌 공약들이 사람들의 목소리와 함께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옹성일은 곧바로 마이크를 들었다.
"그동안 부족했던 점 인정합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다면…"
그때, 마이크를 낚아챈 사람은 젊은 청년이었다.
지역 청년창업 지원사업을 준비하다가 시청의 무관심에 포기한 30대 남자였다.
"시장님, 저한테 한 번 기회를 준다더니 8개월 기다리게 했죠?
저는 그동안 빚만 늘었습니다. 기회라는 말, 그만 써주세요. 누구한테 기회를 주셨는데요?"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정리한 건, 70대 노인이었다.
그는 옹성일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정치는 목소리를 듣는 일이야. 우리가 하는 말, 불편해도 들어야지.
듣기 좋은 말만 골라 듣고, 고개 숙일 땐 선거철뿐이라면, 그게 무슨 지도자요?"
옹성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얇게 떨리는 입술만이 그의 불안한 속내를 보여주고 있었다.
유세차의 스피커에서 ‘성실한 일꾼 옹성일!’을 외치던 음성이 꺼졌다.
그날 이후 그는 다른 지역을 돌며 여전히 선거 유세를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지역 커뮤니티에는 한 장의 사진이 올라왔다.
사진 속 옹성일은 시민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누군가 말했다.
"진짜 고개를 들어야 할 땐 자신이 아니라, 시민들을 봐야 한다는 걸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군."
그리고 선거일. 개표 결과가 나왔다.
옹성일의 낙선이었다.
대신 당선된 이는 시민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SNS로 민원을 받고, 현장을 돌던 젊은 정치인이었다.
이 도시는 그렇게, 고개를 드는 시민들과 함께, 새로운 미래를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