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말 한마디의 온도

엄라이터 2025. 5. 22. 10:44

『말 한마디의 온도』
– 말투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


“밥 줘. 배고파.”
현관문이 열리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말.
그 짧은 두 글자가 오늘도 민희의 마음에 조용히 돌멩이처럼 떨어졌다.
“밥 줘.”
“커피 타줘.”
남편은 부탁하면 다 들어준다.
하지만, "부탁" 하지 않으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15년 전 결혼 초엔 그렇지 않았다. 손잡고 마주 보며, 밥 한 끼도 서로 챙겨주며 웃었었다.
민희는 재택으로 일하며 집안일까지 도맡는다.
아이도 챙기고, 일도 하고, 집안일도 하고…
그런데 퇴근한 남편은 “밥 줘” 한마디다.
무표정한 얼굴에 힘없는 목소리.
그 말투는 민희를 지치게 했다.
그래서 어느 날, 그녀는 폭발했다.
“왜 그렇게 말해? ‘배고픈데, 우리 저녁 먹을까’ 이렇게 좀 다정하게 말 못 해?”
“그게 뭐가 중요해. 밥 해달라는 게 중요한 거잖아.”
“그래, 중요하지 않아 보이지. 근데 나한텐 그게 매일 상처야.”
말싸움은 이어졌고, 서로 등을 돌렸다.
딸 수진이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그 싸움을 매일 들어야 했다.


며칠 뒤, 딸의 학교에서 학부모 참여 수업이 있었다.
주제는 ‘우리 가족의 좋은 말 한마디’.
각자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을 쓴 그림을 발표하는 시간이었다.
수진이는 조심스럽게 발표를 시작했다.
그림에는 엄마, 아빠, 그리고 자신이 웃으며 밥상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저는 우리 집이 이랬으면 좋겠어요.
아빠가 ‘밥 줘’ 대신 ‘고생했어, 맛있겠다.’라고 말하면
엄마가 좀 덜 속상할 것 같아서요.
엄마는 아빠가 다정하게 말하면 더 맛있는 밥을 해줄 것 같아요.
그러면 제가 웃을 수 있거든요.”
교실은 조용해졌다.
그림 한 장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했다.


그날 밤, 퇴근한 남편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여보… 수진 그림 봤어?”
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없이 마주 앉은 두 사람.
오랜만에 서로의 눈을 제대로 마주했다.
“오늘, 좀 피곤하지 않았어?”
그 말 한마디에 민희는 울컥했다.
“어… 좀 그랬어.”
남편은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열고 찬밥을 덜고,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그리고 민희에게 말했다.
“같이 먹자. 오늘 하루도 고생했어.”
민희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눈물이 밥 위로 한 방울 떨어졌다.
이건 너무 작고도 큰 변화였다.


그 후로, 둘은 조금씩 달라졌다.
“여보, 커피 한잔만 부탁해도 될까?”
“응, 기다려봐. 맛있게 내려줄게.”
딸은 조용히 웃으며 창밖을 내다본다.
햇살이 따뜻하다.
가족의 말이 달라지자, 집 안의 공기까지 부드러워졌다.


말은 ‘행동’보다 더 오래 남는다.
밥을 차리는 수고보다,
“고생했어. 정말 맛있었어” 이런 한마디가 마음을 덥힌다.
삶은 거창한 변화로 바뀌지 않는다.
사랑은 매일의 말투에서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