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영서씨의 빈자리

엄라이터 2025. 5. 20. 09:16

《영서씨의 빈자리》

 

퇴근 시간은 언제나 전쟁이었다.
특히 지하주차장에 들어설 때면, 하루 종일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또 자리가 없어...”
영서는 핸들을 돌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 안에는 저녁도 거른 배고픔과 오늘 하루 실수했던 보고서 생각,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초조함이 얽혀 있었다.
아파트 지하 1층, 2층, 3층까지…
돌고 돌아도 주차장은 이미 가득 찬 차량들로 숨이 막혔다. 간신히 2층 끝자락에 이중 주차된 차를 발견하곤, 영서는 그 뒤에 차를 댔다.
그리고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창문에 붙이며 혼잣말을 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 진짜.”
사실 이건 어제도, 그저께도, 그리고 그전 주말에도 반복되던 일이었다.
이제 이 아파트에선 누구나 이중 주차가 일상이었고, ‘차 좀 빼주세요’라는 문자는 주민들 사이 일종의 인사말이 되어버렸다.
그날 밤, 영서는 차를 빼달라는 전화를 두 번이나 받았다. 샤워하다 뛰쳐나오고, 겨우 눈 붙이려다 또다시 내려가는 일에 지쳐 있었다.
그러던 중, 엘리베이터 안에서 비슷한 시간대에 주차 전쟁을 겪는 또 다른 주민, 502호 권 할아버지와 마주쳤다.
“영서씨도 고생 많지. 난 어제는 30분을 돌다가 그냥 밖에 대고 잤어. 아침에 벌써 딱지 떼였지 뭐야.”
영서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우리 아파트엔 왜 이리 차가 많은 거죠… 차가 줄지 않으면, 갈등만 늘 텐데요.”
그날 밤, 영서는 처음으로 ‘분노’ 대신 ‘궁금증’을 품었다.
‘왜 항상 같은 시간대에 이 난리일까? 혹시 시간만 조금씩 나눌 수 있다면?’
다음 날, 영서는 회사에서 조용히 커뮤니티 포스터 하나를 만들었다.

〈우리, 조금씩 양보해볼까요?〉

이 포스터에는 간단한 주차 시간 분산 아이디어가 담겼다.
예:

  • 퇴근이 빠른 주민은 지하 1층, 늦은 주민은 지하 2~3층
  • 주차 가능 시간이 겹칠 경우, 가급적 같은 라인끼리 협의
  • 일요일엔 주차 ‘양보의 날’로, 멀리 세우고 운동 삼아 걷기

그리고 하단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었다.
‘한 사람이 10분 양보하면, 열 사람이 1시간 덜 힘들어집니다.’
영서는 이 포스터를 관리사무소와 엘리베이터, 지하주차장 입구에 붙였다.
처음엔 무반응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누군가 자필로 메모를 더했다.

  • “3동 804호입니다. 저는 퇴근이 늦어요. 지하 2층 배정해 주시면 감사해요.”
  • “1동 204호는 낮 시간엔 비어 있어요. 낮 주차 필요하신 분 쓰세요!”
  • “일요일 양보의 날, 우리도 참여합니다 – 2동 601호 가족”

며칠이 지나자, 아이들이 만든 듯한 그림도 하나 붙었다.
‘주차는 자리싸움이 아니라, 마음 나누기예요 😊’
어느새 영서의 제안은 ‘우리 아파트 주차 양보 프로젝트’로 발전했다.
이사 온 지 5년 동안 한 번도 말 나눈 적 없던 주민들끼리, 이제는 서로 이름을 알고, 주차 문제로 생기던 얼굴 찌푸림 대신 “감사합니다”가 들리기 시작했다.
가장 놀라운 건, 주차자리는 여전히 부족했지만 갈등은 점점 줄어들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