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하늘이를 기다리는 시간

엄라이터 2025. 5. 20. 09:07

《하늘이를 기다리는 시간》

 

초등학교 3학년 2반 은비는 전학 오는 친구 이야기를 듣고 두근거렸다.
“이름이 하늘이래. 여자아이래. 근데… 앞을 잘 못 본대.”

‘앞을 못 본다고? 그럼 그림은 어떻게 그릴까? 글씨는 어떻게 써?’
은비는 궁금했지만, 뭔가 조심스럽기도 했다. 처음 보는 ‘다름’은 신기하면서도 조금 낯설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하늘이는 엄마의 손을 잡고 교실에 들어섰다. 양쪽 눈은 반쯤 감겨 있었고, 팔에 희고 반짝이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얘들아, 오늘부터 우리 반에서 함께할 친구야. 이름은 하늘이. 눈이 조금 불편하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밝단다.”

아이들은 박수를 쳤지만 조용했다.
‘어떻게 말을 걸지?’ ‘괜히 상처 줄까?’ 그런 눈빛들이 교실을 맴돌았다.

하늘이는 맨 앞자리에 앉았고, 선생님은 은비에게 하늘이 짝을 부탁했다.
“은비는 말도 잘하고 다정하니까, 하늘이 옆에서 많이 도와줄 수 있겠지?”
은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첫날 점심시간, 은비는 도시락을 먹으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늘아, 혹시 이건 김밥이야. 안에 당근이랑 단무지, 햄도 있어. 너 당근 좋아해?”
하늘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해. 목소리로 들으면 은비가 웃고 있는 게 보여.”

은비는 그 말에 가슴이 찌릿했다. 하늘이는 정말 ‘보는’ 것보다 더 잘 ‘느끼는’ 친구였다.

며칠 뒤, 음악 시간엔 친구들이 악기 연습을 했고, 하늘이는 조심스레 실로폰을 두드렸다. 손끝으로 위치를 외우고, 소리를 듣고 음을 찾아내는 모습에 선생님도 감탄했다.
“하늘이는 귀로 그림을 그리는 친구구나.”

하지만 어느 날, 소풍 일정이 잡혔다.
“이번엔 숲속 생태체험이래! 연못도 있고, 작은 폭포도 있대!”
아이들은 들떴지만, 은비는 걱정스러웠다.
‘하늘이는… 괜찮을까?’

당일 아침, 비가 쏟아졌다. 학교는 소풍을 취소했고, 아이들은 실망했다. 체육관에 모두 모여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선생님이 제안했다.
“그럼 오늘은 ‘소리로 떠나는 소풍’ 어때? 하늘이가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을까?”

하늘이는 처음엔 머뭇거렸지만, 은비가 손을 꼭 잡아주자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한 체육관에서, 하늘이는 천천히 말했다.
“비 소리는 나한테 숲길이야. 차분하고 부드러워. 한 발짝씩 걷는 느낌… 새들이 나무 위에서 비를 피하면, 잎이 살짝살짝 흔들려. 그건 숨바꼭질하는 소리 같아.”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들었다. 눈을 감으니 정말 숲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늘이의 말이 끝나자 체육관에는 조용한 박수가 울렸다. 은비는 하늘이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너랑 함께라서, 오늘 비가 와서 더 좋았어.”

그날 이후, 하늘이 주변엔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누군가는 점자를 배우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하늘이의 손에 그림을 설명해 주었다.
은비는 매일 아침 하늘이에게 말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수록, 너랑 나누는 하루가 더 빛나는 것 같아.”